The Asian Classic – Vol.1

The Asian Classic – Vol.1

축구에 있어 라이벌매치는 팬을 흥분시킨다. 라이벌 관계는 주로 역사적 요인으로 형성되는데 대리전쟁의 성격을 띄는 축구에 있어서 라이벌의 존재는
지나친 과격함이 폭력으로 이어지는 부정적 측면도 존재하지만 서로를 자극하고 발전시키며 승리하는 쪽에 두배 이상의 만족감을 제공하는
(물론 패하면 그 후유증은 오래 간다…-_-)
긍정적 측면이 보다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라이벌은 인위적으로 만든다고 형성되지는 않는다. 역사적, 지리적 배경이 존재하고 자주 부딪치며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면
그 관계와 의의가 보다 더 커짐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스포츠건간에 일본만은 꺾어야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축구 한일전은 양국의 관계를 상징하는 아시아의 고전적인 라이벌 매치라 할 만하다.
1954년부터 지금까지 약 55년간 한일전의 결과에 따라 사퇴하거나 경질된 양팀의 감독이 14명에 이른다는 사실(한국4명 일본10명ㅎㅎ)이야말로
양팀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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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라 원숭이들은 영원히 우리 발바닥이나 핧거라!

1954년 3월 7일 스위스 월드컵 예선 1차전에서의 첫 대결부터 1998년 12월 7일 아시안게임에서의 대결까지 20세기 전적은 64전 37승 17무 10패의 압도적 우위.
동아시아의 호랑이 한국축구는 강한 피지컬과 스피드, 투지를 앞세워 항상 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해 왔고, 역사적인 원수 일본에게 유달리 강했다.
첫 대결부터 드라마틱했다. 해방 이후 전쟁의 아픔을 겪은 한국의 1954년 스위스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과 맞붙게 되고,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이 시기 이승만대통령이 일본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경기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지만
당시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이유형 감독이 경기의 당위성을 설득하여 홈앤어웨이가 아닌 도쿄에서 두 경기를 벌이게 되는 것으로 경기가 성사된다.
이유형 감독이 “만일 일본에서 지면 선수단 모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약속을 하고서야 승락을 받았다니 당시의 후덜덜한 분위기가 짐작되지 않는가?
(이건 뭐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보다 더한 부담이었을듯..)
한마디로 목숨 걸고 뛴 한국팀은 일본과의 두 게임에서 5-1, 2-2로 1승 1무를 기록하며 역사적인 첫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손에 넣는다.
당초 일본과 경기를 가지는 것 자체로도 부정적이었던 이승만대통령이 대대적으로 선수단을 환영하며 그 노고를 치하했다고 한다.
원수를 꺾고 한국 역사에 길이 기록될 최초의 월드컵 본선행을 이루었으니 만약 당시에 TV가 있었으면 시청률 90% 넘기고 하루 24시간 내내
그 경기만 재방송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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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1년만인 1954년 스위스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당시의 한국 대표팀>

이후 일본은 한마디로 한국의 호구였다.
월드컵예선, 올림픽예선 등 주요 경기에서 한국은 매번 일본을 격파했고 72년부터 양국의 우의(우의라고 쓰지만 한국팀의 ‘우위’라고 읽는다)를
다지기 위해 연 1회씩 정기적으로 맞붙은 ‘한일정기전’에서도 15번 맞붙어 꼴랑 세번 지고 다 이긴다.
일단 한국팀은 일본을 호구로 여기면서도 ‘지면 죽는다’는 사회분위기를 충실히 받들어 절대 방심하지 않고 무조건 박살내려 했고
야구의 나라 일본은 축구를 잘 못하기도 했지만 딱히 축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돌파구를 찾지 못했던 듯 하다.

 
반도의 열등한 조센징 따위는 이제 축구에서도 밟아주겠어

1990년대들어 ‘호구의 반격’이 시작된다.
1980년대 전두환정권의 3S정책의 일환으로 급조된 한국의 프로축구와는 달리 약 10년을 착실히 준비해서 100년을 내다보고 창설한
일본프로축구리그(J리그)가 그 신호탄이었다. (1993년 리그 출범)
언론과 축구팬의 붐 조성과 함께 스타플레이어가 등장하고 일본축구는 거대한 신드롬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데 얄미운 ‘카즈댄스’로 유명한
미우라 카즈요시가 이때 등장한 대표 스타플레이어이다.
(브라질 유학파여서 그런지 몰라도 골을 넣고 삼바댄스를 추는 이 선수 특유의 세레머니가 화제가 되었는데 한국팬의 입장에서 이 춤을 보면
뒤통수를 한대 가격하고 싶은 충동이 -_-,,,,)
이 선수는 일본언론 특유의 스타만들기와 적절히 조화되어 브라질 유학이 붐을 이루던 당시의 일본축구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등극하기에 이르는데
1980년대 일본 선수들이 유벤투스 등 당시 세계 최강의 클럽에서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한다는 황당무계한 내용이지만 엄청난 인기를 누린 만화 ‘캡틴 츠바사’가
세계에 나타났다고 설레발이 대단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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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쯔바사의 재림? 미우라 카즈요시> <미우라의 골세레모니(카즈댄스)를 흉내내는 마스코트>

어쨌든 이전까지 뜨뜻미지근하던 한일전이 다시금 불타오르는 계기가 되면서 1993년 한국과 일본 양팀은 마치 운명처럼 월드컵 본선행을 놓고
카타르의 도하에서 맞붙게 된다.(1994 미국월드컵 예선)

 
‘도하의 기적’과 ‘도하의 비극’

당시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은 한국, 북한, 일본, 사우디, 이란, 이라크 6개국이 본선티켓 2장을 놓고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full league를 펼치게 되었다.
한국은 첫 경기 이란을 3:0으로 제압하고 본선 3회 연속 진출을 위한 순조로운 출발을 하였으나 이후 이라크, 사우디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며
1승 2무로 다소 불안한 행보를 보이고 있었고 일본은 1승 1무 1패라는 중간 성적을 기록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탈아시아급의 걸출한 스타 오와이란을 앞세운 당대 최강 사우디아라비아가 본선티켓 2장 중 1장을 무난히 차지하지 않겠냐는 예상과 함께
한국, 일본, 이라크가 남은 1장을 놓고 피튀기는 혈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운명의 라이벌전. 경기장의 분위기는 예전과는 다른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는데…
중요한 승부의 고비에서 한국은 유독 일본에게 강했고 일본은 한국을 넘지 못해 항상 좌절했었지만 J리그 출범 원년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이 시기 ‘니뽄의 영웅 카즈’와 브라질 출신 귀화선수 라모스, 일본수비의 거목 이하라가 이끌던 당시 일본 대표팀과 이를 바라보던 일본팬들의 기대는
하늘 넘어 안드로메다로 향한다.
‘영웅 카즈’는 ‘한국정도는 이젠 니뽄의 적수가 아니다’ 등등의 자극적인 발언을 연일 쏟아냈고 푸른 유니폼을 맞춰 입은
(당시 한국에는 서포터 문화가 생소한 때여서 징이나 꽹과리, 아리랑노래 등을 이용해 전통적인 응원을 하던 시기였다..)
일본의 서포터들이 중동으로 대규모 원정응원을 떠난다. 경기 전 푸른 물결로 경기장을 물들이더니 ‘KOREA? NO! KEROA’라는 현수막이 등장하기에 이르고
이는 한국 축구팬을 폭발시켜 반일감정을 극에 달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keroa는 일본어로 ‘하인’을 뜻하는 단어인데 한국을 하인에 비유함으로써 옛 일제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심하게 자극적인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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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과 일본 대표팀>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고,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등에 업은 일본은 ‘타도 한국’을 기치로 힘찬 플레이를 전개해 나갔다.
일본은 더 이상 임기응변에 약하고 판에 박힌 플레이를 하다가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교과서 축구’의 팀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의 약점이었던 측면수비를 집요하게 공격했고, 일본의 기세에 제압당한 한국은 전체적으로 부진한 플레이를 펼치면서
골키퍼 최인영과 홍명보가 이끄는 수비진이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결국 후반들어 ‘한국킬러이자 일본축구의 상징’ 미우라 카즈요시에게
선취골을 허용하고 한국의 모든 TV수상기에 리모콘이 날아든다. -_- 이후 반격에 나섰으나 오히려 일본의 역습에 여러 차례 휘말리며
무기력하게 1:0으로 패배한다.
이 패배로 한국은 예선탈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사우디와 일본의 월드컵 진출이 유력해졌다.
KEROA 사건으로 상처를 받은 한국 축구팬들은 ‘영원한 호구’에게 경기에서마저 완패를 당하자 분노와 충격에 휩싸인다.
더불어 월드컵 연속 3회 진출이라는 목표달성의 가능성도 매우 희박해진다.
마지막 경기는 한국:북한, 이라크:일본전이 동시에 펼쳐지는 대진이었다.
한국이 북한에게 승리하더라도 일본이 이라크를 꺾으면 일본이 본선에 올라가는 상황.
한국은 ‘한 핏줄’ 북한(스포츠에선 한 핏줄이 맞는 것 같다.-_-)과의 경기에서 3:0으로 완승을 거두지만 경기종료 휘슬이 울린 당시 모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고개를 푹 숙인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동시에 다른 경기장에서 펼쳐지던 일본:이라크의 경기에서 2:1로 일본이 앞선 상태로 인저리 타임이 진행중이라 이대로 끝나면 일본이 월드컵에 나가고
한국은 탈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초상집, 일본은 국가적인 축제 분위기인 순간이었다.
인저리타임도 다 지나가고 11초가 남겨져 있던 마지막 이라크의 코너킥 찬스. 일본 만화 ‘캡틴 츠바사’에서나 일어날 사건이 벌어진다.
이라크가 코너킥 마지막 공격에서 수비수 움란 자파르가 기적적인 동점골을 터트린 것이다.
10초를 남겨놓고 일본 열도는 울음바다로 돌변하고 한국은 돌연 축제의 한마당으로 반전된다. 승점은 동률이고 골득실차로 사우디에 이어
한국이 2위를 차지하며, 월드컵 3회 진출의 위엄을 달성한 것이다.

http://youtu.be/mwX7qcfMvvo

<비통한 일본, 신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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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일본에서는 ‘도하의 비극’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도하의 기적’이라 부른다.
한국 주재 이라크 대사관에는 감사의 전화와 편지 등이 엄청나게 쇄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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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뻘건 바탕의 파란 글씨가 인상적인 추억의 스포츠서울>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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